측천 무후에 대하여
[ 측천무후 ]
≫≫인물탐색
≫ 측천무후 (则天武后) 이름의 변천사
古代一般有文化和有地位的人分为三个部分:姓、名、字
고대시대는 일반적으로 지식 있는 사람과 지위가 있는 사람은 이름을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성, 이름, 칭호)
★ 측천무후 (则天武后)
姓 : 武 、名 : 照 (황제 등극 후 曌로 개명) 、
字 : 媚娘 (则天 으로 개명)
[*참고 : 后는 皇后(황후)라는 뜻.]
≫≫ [측천무후]가 주(周)나라를 통치했을 때 경제적 상황은?
[원문] – 자료출처 : http://www.sichuantour.com/custom/detail.asp?ID=237
对于农业生产,则天也非常重视。她说:“建国之本,必在务农”,“务农则田垦,田垦则粟多,粟多则人富”。她规定,能使“田畴垦辟,家有余粮”的地方官升任;“为政苛滥,户口流移”的“轻者贬官,甚至非时解替”。这样,在她执政的年代里,农业和手工业都得到较大的发展。人口不断增加。据当时统计,永徽时全国户数为38O万户,到则天临终的神龙元年,渐增为6i5万户,几乎增长一倍。仅此一点即可看出这一时期的农业经济发展情况。
측천무후 역시 농업생산을 중시 여겼다. 그녀는“건국의 근본은 농업에 주력 하는 것 이고, 농업에 주력함은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이며 경작지를 개척함은 곧 곡식이 많아지는 것이다. 또 곡식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람이 부유해 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관리를 임명하여 논밭을 개간하여 집안에 여분의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정치적 강화를 위해 친척을 멀리 보내고, 친척이라도 무능한 자는 관직에 임용도 않았고 심지어 즉시 해임시켰다.
이처럼 그녀가 권좌에 있는 동안 농업과 수공업 모두 뚜렷한 큰 발전이 있었으며 인구도 끊임없이 증가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영휘시대의(당나라의 연호) 전국의 호수는 380만 가구 였고 측천무후가 임종하던 신룡(당나라의 연호)원년까지 점차 증가하여 615가구로 거의 2배로 증가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농업경제발전 상황을 알게 해준다.
≫≫ [측천무후] 업적
★ 새로운 인재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주관
★ “무거 (武擧)”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
★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관리하는데도 매우 신경을 많이 씀
★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
★ 농경장려, 인재중용, 측근단속 등의 조치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를 효과적
으로 안정
--> “건언12사 (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 실행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
--> 최초의 여황제로서의 측천무후는 잔혹한 실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이 된 이유는 그녀의 정치적인 공헌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고종이 측천무후에게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넘겨준 까닭도 바로 그녀의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 [측천무후]에 대하여..
617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무측천의 아버지는 군수관(보급물자 담당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에 그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했다. 이로써 그는 14명의 개국공신 행열에 들어가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 620년 무측천의 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후 그들은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번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그녀는 14세 때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으나, 성격이 거친데다 권력을 향한 야망이 또한 짙어서 태종은 그녀를 총애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죽은 후 심약한 고종으로 하여금 권력을 뒤흔들거라 판단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태종에게 장안의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겠다고 선수를 치게 된다. 그 시절 왕의 후궁들은 왕이 죽으면 비구니가 되는 일이 빈번하였기에 태종은 쉽게 허락하게 된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고 절로 떠나기전 자신보다 어리고 유약한 고종을 한껏 자신에게 빠지 도록 한 후에 절로 향하는데...훗날 고종의 황후 소숙비로 하여금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고, 자신이 황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 딸 아이의 목을 졸라 황후가 한 짓이라 모함을 함으로써, 황후를 폐위시키고 황후의 자리로 등단하게 된다.
무측천은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건언12사(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후 고종이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무측천에게 넘겨주었던 까닭도 바로 그녀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690년 9월 9일 중앙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나는 이미 82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모두 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구려. 차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는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주시오."
그리고는 다시 중종에게 자기에 의해 학살된 황후와 저수량·한애(韓?) 등의 가족을 사면해 달라고 부탁했다.당(唐) 현종(玄宗)이 즉위한 후에는 다시 "측천황후(則天皇后)"라 하였으니 비교적 객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749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무측천의 휘호를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하였다.
무측천은 약 반세기 가량 국정을 다스리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농경장려, 인재중용, 측근단속 등의 조치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안정시키고,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업적을 공고히 다져서 경제를 윤택하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녀는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지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그 정치적 공헌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녀는 불교 장려의 일환으로 대단위 사원 공사를 벌여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어떤 학자들은 무측천이 재위 시절에 자신의 정적 제거와 불교 사원 건축에 대부분의 정력을 쏟아부어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지연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자료출처 :
http://www.mtcha.com.ne.kr/world-man/china/man149-chugchunmuhu.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