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가 되면 여느 방송국이나 빼놓지 않고
경쟁적으로 방영하는 것이 중국 무협영화입니다.
그러나 특선 중국영화라고 하기에는 영 시답지 않습니다.
허접스러운 구성과 과장된 동작,
어설픈 분장과 황당한 설정 등의 3류 영화가
명절 특선 영화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만
아마도 어린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세대를 넘어
그럭저럭 눈요깃감으로 볼 영화인 듯 싶어 방영하는 듯 합니다.
하기야 TV에서 명절 때면 연예인의 노래 솜씨와 말장난과
어설픈 동작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쇼-프로그램이나,
외국인을 내세워서 그들이 간접화법으로 전하는 한비어천가(韓飛御天歌)들으며
대한민국인 임을 자위하는 프로그램도 중국영화만큼이나 반복 됩니다만………
중국영화에 대한 첫만남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왕우 주연의 ‘방랑의 결투’라는 홍콩영화였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즐거움과 재미였습니다.
그 충격은
< 중국영화는 이 땅에 들어오는 족족 모조리 보리라>는
단호한(?) 결의로 이어지기 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본 영화들의 제목을 나열하면
‘방랑의 결투’ ‘돌아온 외팔이’ ’용문의 결투’ ‘금도괴객’ ’흑나비’
’대협객’ ’일대검왕’ 등이었고 영화를 보고 나올 때면
나도 마음만 먹으면 날아다닐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였죠.
그러다가 이소룡의 ‘용쟁호투’와 ’당산대형’까지는 좋았는데
성룡의 ‘취권’ 이후 내게 중국영화의 매력은 사라졌습니다.
무술영화에 흥분할 나이도 훌쩍 넘어 섰고
또 그간 보아왔던 무술영화의 주조인 비장미가
코믹으로 바뀌면서 정나미가 떨어진 것입니다.
특히 ‘강시’류의 영화에 이르러서는
정나미를 완전히 떨쳐 버리는데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몇 년 후 주윤발의 ‘영웅본색’에 대한 입소문으로 다시 극장을 찾았는데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류작들로 인해 흐름은 신속히 망가졌습니다.
중국영화라고 하면 <홍콩><대만><중국>을 모두 뭉뚱그린 표현이 됩니다.
이를 조금 분리시켜 말씀 드리면
<홍콩>
홍콩영화는 1960년대부터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즉 대륙의 영향이 아닌 홍콩에서 교육 받은 세대들의 대거 등장입니다.
수많은 외팔이 시리즈나 소림사 시리즈가 홍콩의 것입니다.
배우로는 60년대의 왕우(王羽), 강대위, 70년대의 브루스 리(李小龍), 재키 찬(成龍),
홍 진빠오(洪金寶), 80년대의 추 윤파(周潤發), 앤디 류(劉德華) 등이
대중의 스타로 자리했습니다.
감독으로는 킹후(胡金銓), 안후이(許鞍華), 쑤이 하크(徐克)은 황비홍과 신용문객잔, 소오강호 등의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요.
오우삼(吳宇森) 감독이나 유자량(劉家良)도 오락영화를 하지만
독툭한 자신의 세계를 펼친 감독입니다.
<대만>
1980년대 대만 뉴 웨이브를 통해 젊은 감독들이 등장합니다.
에드위드 양(楊德昌). 천 쿤호후(陳坤厚),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등입니다.
또한 에드워드 양과 코이첸, 타도우첸(陶德辰), 추안잉(張穀)
이렇게 4명의 감독이 공동연출한 <세월의 이야기>(光陰的 故事)는
대만 뉴웨이브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영화발전이 지체 된 것은 대만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륙과의 긴장은 영화검열이 엄격했고 소재의 제한이 컸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해빙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독으로 허우 샤오시엔(侯孝賢)이 세계적인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펭퀘이에서 온 소년>과 <동동의 여름방학>으로
2년 연속 앙뜨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습니다.
<바람 속의 먼지>(연연풍진)에 이어
1988년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대만 역사의 슬픔을 표현한 비정성시(悲情城市)가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합니다.
1987년, 똘똘한 중국영화 하나가 한반도에 상륙합니다.
중국을 1세대, 2,3,4,5세대로 나누면 5세대에 해당하는 감독인
장이모우(張藝謨)의‘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입니다.
평론가들의 소질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이 나누고 찢는 것입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
영화 평론가들은 중국의 영화감독을 세대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영화개척자 1세대, 193,4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개발하였던 2세대,
영화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성립 후 영화계에 투신했던 지금의 중견 작가군 3세대,
영화를 공부했지만 문화혁명이 끝날 때까지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4세대.
그리고 1982년 이후의 세대가 5세대로 구분합니다.
중국영화의 혁명적 변화는 4,5세대가 주도하였습니다.
4,5세대의 대표주자들을 서구 평론가 구룹에서는 중국의 선봉파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말은 20년대 프랑스의 아방 가드( Avant-garde), 50년대 말의 누벨-바그,
60년대 미국의 New American 구룹과 독일의 오벨하우젠 선언을 주도했던 구룹과
같은 반열의 의미부여였습니다.
4,5세대 감독을 잠시 소개하면
티엔주왕주왕(田壯壯), 장준자오(張軍釗 ), 우쯔녀우(吳子牛), 황지엔신(黃建新) 등을
선봉파의 기수라고 합니다. 물론 장이모우(張藝謨)도 함께.
1984년 켄 카이거(陳凱歌)의 황토지( Yellow Earth)가 전 세계에
중국영화의 바람을 일으켰을 때 장이모우는 이 영화에서 촬영을 맡았습니다.
장이모우는 중국정부가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설립한 북경대 연극영화과 졸업생으로
영화 현장에서 도제식으로 학습 받은 세대가 아닌
전공을 통해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교육 받은 최초의 세대입니다.
또한 5세대는 중국의 고유문화 뿐 아니라
자유를 상징하는 롹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세대이자
내일보다는 지금을, 저기보다는 여기를 중시 여기는 차별화된 세대입니다..
즉 내일의 중국을 설계하며 험난한 역경을 걸은 혁명세대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미국문화에 맹종하는 철부지 포스트 세대도 아닌
양쪽을 고루 받아들이고 고민하며
수직과 수평을 쌍방향으로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세대라는 점도
이들 영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붉은 수수밭>은 장이모우의 데뷰작이기도 하고
그의 영화 파트너인 공리의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조의 적절한 배치는
붉은색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비단 붉은색 뿐 아니라 영상에 있어서의 색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조명과 필름의 색조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수작이었습니다.
아울러 영화의 시간길이, 즉 호흡에 있어서도
동양적인 시간길이를 편집에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면서
서구인들에게 정적인 신비감과 감성의 공간을 확장 시켰습니다.
영화에 있어 붉은 색의 진군은 전족으로 대변 되어지는
봉건구조에 대한 또 다른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붉은 색의 고량주 술동이를 들고 일제 침략군을 물리치는 발상의 전환이라니 ….
그는 이 영화에서 베를린 영화제 작품상인 금곰상을 받습니다.
1990년의 ‘국두’도 즐거운 영화였죠.
영화의 색조를 염두에 두고 염색공장을 배경으로 하여 화이트, 레드, 블루가
질문하고 응답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원색의 포토제닉이었습니다.
1993년의 '귀주 이야기'는 중국의 관료귀족들을 고발한 영화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파열하는 속에서 겪는 갈등과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찬찬히 잘근잘근 표현해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금사자상을 받게 됩니다.
’홍등’,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책상서랍 속의 동화’ 등
그의 화려한 수상복은
DJ의 노벨 평화상처럼 물고 뜯는 소문이 전혀 없이
그저 카메라라는 뚝심 하나로 이룩한 치열한 창작노동의 산물이었습니다.
'중국 음악·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장쯔이의 귀여운 모습! (0) | 2006.06.27 |
---|---|
[스크랩] 동양인 리안’ 아카데미 역사 새로 쓰다 (0) | 2006.03.10 |
[스크랩]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중국어 버전) (0) | 2006.02.08 |
[스크랩] 기억 하십니까? 천장지구의 오천련을.... (0) | 2005.12.19 |
[스크랩] 중국어 TV 방송국 NTDTV (0) | 2005.12.12 |